좌측엔 용왕탑(남쪽)..산신탑(중앙,정상석옆),
용왕탑(남쪽).
칠성탑(북쪽).
지금으로부터 39년전 해발1288m의 치악산 정상 시루봉에 돌탑을 쌓기 시작한 고,용진수씨
(당시나이 52), 원주지역에서 불가사의로 불릴 정도의 돌탑 3개를 12년만에 완성하고 나서
2년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원주시 봉산2동에서 살고 있던 부인 윤귀남씨로부터 들은 20년 전의 인터뷰 내용
(당시 발행되던 월간 치악저널)을 재구성 해본다.
“남편의 꿈에 산신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치악산 정상에 봉우리가 셋이 있으니 그 곳에
3개의 돌탑을 쌓아라” 하는 것 외에는특별한 동기가 없다고 한다.
당시에 용진수씨의 짝달막한 키와 왜소한 체격을 본 사람들은 도저히 치악산 정상으로
돌을 옮겨 탑을 쌓을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기에 오로지 신의 조화로 쌓았다고 이야기들 한다.
처음에는 가족은 물론 온 집안 친지들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도저히 의지를 꺽을 수가 없었다.
특히 같은 꿈을 한두번도 아니고 여러차례 꾸게된 본인의 의지를 꺽을 수가 없었다.
처음 탑을 쌓기 시작하여 5~6년 동안은 이웃이나 주위 사람들이 전혀 알지를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 집을 나서면 최소한 일주일 후에나 집으로 돌아오기에 마을 사람들의
눈에 뜨일 리가 없었다.
탑을 쌓는 도중에 백일기도를 시작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부인의 산행이 시작된다.
지금 같이 잘 다듬어진 등산로가 있지도 않은 산길을 남편의 식량등을 나르기 위해
오르내린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등산로는 고사하고 우거진 풀섶과 나무등걸을 헤치고 식량을 운반 하고나면 온몸은 상처투성이다.
남편이 기도를 올리는 장소는 정상에 위치한 약수터 바위 아래, 부인이 이곳까지 오르내린 코스는
입석대를 커쳐 정상에 오르는 코스다.
여인의 몸으로 밤낮 안가리고 헤아릴 수 없이 오르내렸다니 이 또한 믿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탑을 쌓는데 사용된 도구라고는 사다리와 15~6개의 정(丁)뿐이고 또 하나 있다면
돌을 나르기 위한 자루가 고작이다.
당시 『센베이』라고 부르던 과자를 만들어 전국 각지로 팔러 다니던 용진수씨가
처음에 사용한 돌은 원주천 봉천내 돌이였지만 나중에는 꿈에 현몽한 대로 전국 각지의
강과 바닷돌을 날라왔다.
지금처럼 자동차가 많지 않은 당시에 전국의 돌을 담은 자루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완행버스와 간간히 얻어타는 트럭이 전부였다.
정상까지 한번에 지고 오를 수 있는 양이라야 수박덩이 만한 돌 세 개정도다.
이렇게 운반한 전국의 강과 바닷돌로 한층 한층 5층 탑을 쌓다가 무너져 내리기도 여러번
하지만 용진수씨는 한번도 실망이나 후해를 해 본일이 없다.
탑을 쌓은 후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특별히 좋은 일이나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집안에 큰 탈없이 무던히 지내온것이 지성으로 탑을 쌓은 덕이 아니겠는가 라는
소박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산신탑(중앙부 주탑), 칠성탑(북측 보조탑),용왕탑(남측 보조탑) 입니다.
- 1964년 석탑 3기 축조:용진수 축조
- 1967년 1차 붕괴(복원):용진수 복원
- 1972년 2차 붕괴(복원):용진수 복원
- 1994년 3차 붕괴(복원) : 치악산 국립공원 관리공단 복원
- 1999년 4차 붕괴:3차 복원 후 재 붕괴
- 2004년 복원 완료 : 현제의 돌탑으로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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