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화엄사를 잠시 들려보고.. 아주 오래전 지리산 화대종주 할때 이곳을 지났을텐데...ㅎ.
일주문에서 입장료 3,500원을 내고 주차장까지 들어갔다(약 1km 남짓)..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 앞에 동오층석탑.. 보물 132호.
각황전 앞에 서오층석탑.. 보물 133호.
각황전 앞에 석등.. 국보 제 12호..높이 636cm.
기단부·화사석·상륜부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의 팔각석등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크다.
각황전... 국보 제67호.
화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로서 국보와 보물 등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각황전은 대웅전과 함께 화엄사의 주불전이며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 중층 건물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다보불 등 3여래(三如來)와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知積菩薩) 등 4보살(四菩薩)을 봉안하고 있다.
화엄사는 1636년(인조 14)에 작성된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華嚴寺事蹟)」 등 여러 문헌에서 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각황전은 본래 장륙전(丈六殿)으로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3층 7칸으로 건립하였으며 내부에는 화엄석경(華嚴石經: 화엄경 원전을 엷은 청색 돌에 새긴 것, 보물 제1040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에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 13) 8월부터 화엄경 사경(寫經: 후세에 전하거나 공덕을 쌓기 위해 베낀 경전)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경내의 석조물들과 화엄석경의 글씨체도 8세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화엄사와 장륙전은 8세기에 중후반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륙전은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에 이르는 화엄사의 전각들이 대부분 불에 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화엄사는 1630년(인조 8) 벽암대사가 중건을 시작하여 1636년(인조 14)에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1699년(숙종 25)에는 벽암대사의 제자인 계파(桂波) 성능선사(性能禪師)가 왕실의 후원을 받아 4년 동안 중창불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장륙전은 1702년(숙종 28) 중건되었으며 2층 7칸으로 전보다 층수가 줄어들었다. 완공 후 숙종은 자신이 직접 쓴 ‘각황보전(覺皇寶殿)’이라는 편액을 내려 이때부터 각황보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3여래와 4보살상을 봉안하였는데 중건 이전에는 금산사 미륵전처럼 입상(立像)이 모셔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황전은 1768년(영조 44), 1847년(헌종 13), 1851년(철종 2)에 각각 중수하고, 1860년(철종 11)에는 후불탱화 3폭을 조성하여 후불벽에 걸었다. 1885년(고종 22)에 또다시 중수하였고 1936년부터 1941년까지 해체·보수되었다. 1961년에 보수한 뒤 이듬해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부분적인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내용
화엄사는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을 거쳐 중심 영역으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보제루 옆을 지나면 동·서 5층석탑이 있는 넓은 마당이 나오고 높은 석단 위에 각황전, 대웅전, 원통전 등 주요 불전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제루와 축을 이루며 남향하고, 각황전은 대웅전과 직각 방향으로 서향하고 있다. 배치 구성에서 특이한 점은 동·서 5층석탑이 대웅전과 각황전의 중심축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비켜서 있다는 것이다. 화엄사에는 2개의 주불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주불전으로 인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각황전에 오르는 계단보다 대웅전에 오르는 계단을 넓게 구성한 것도 높은 각황전이 먼저 인식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웅전을 향해 시각과 동선을 유도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각황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마당 중앙에는 6.4m 높이의 석등(국보 제12호)이 자리한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석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각황전은 기둥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架構式)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조선 후기 중건하면서 기존에 있던 기단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초석은 원형 주좌를 새긴 사각형의 가공초석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위·아래층 모두 내외 2출목(出目) 구조이다. 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소첨차와 대첨차가 사용되었다. 초제공과 2제공은 쇠서가 위를 향해 뻗은 앙서형(仰舌形)이고, 3제공은 익공(翼工)이며, 4제공은 운공(雲工)이다.
가구 구조(架構構造)는 전체적으로 볼 때 3고주 9량 형식이다. 아래층 바깥 기둥열의 평주와 안쪽 기둥열의 고주에는 퇴보를 결구하고 퇴보 위에는 위층 변주(邊柱)를 세웠다. 위층 퇴보는 아래층 퇴보와 마찬가지로 안쪽 기둥열의 고주에 결구되어 있다. 대들보는 위층 기둥과 내부 최고주(最高柱: 가장 높은 기둥)에 맞보 형식으로 결구되었으며 아래쪽에는 고주를 세워 받쳤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최고주와 함께 종보를 결구하였으며 그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천장은 모두 우물반자를 시설하였는데 주심도리에서 하중도리까지는 빗천장으로 처리하였다.
특징
화엄사 각황전은 현존하는 중층불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가구 구조는 아래층에서 반 칸씩 줄여 위층을 구성한 반칸물림방식으로, 조선 후기 중층건물의 구조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공간은 층의 구분 없이 통층(通層)으로 구성하여 웅장한 느낌을 준다. 대형 공간에는 최대한 빛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래층에는 사방에 많은 창호를 설치하였으며 위층은 벽체 대신에 채광창을 두었다. 바닥에는 본래 전돌을 깔았으나 1998년에 예불의 편의를 위해 마루를 설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웅장하면서도 안정된 균형감과 엄격한 조화미를 보여주며 건축기법도 뛰어난 건축물이다. 내부에 봉안된 7구의 불·보살상과 후불탱화도 조선 후기의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각황전옆 홍매화(흑매).. 져가고 있었다..
우측에 대웅전.. 저 앞에 각황전..
각황전 뒤로 동백숲..
황매화..
금창초..
국보 제35호.. 사사자 사리석탑은 해체 복원중 이더군요..
삼성각..
각황전... 국보 제 67호..
대웅전..보물 제299호.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보물 제299호.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보물 제299호.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보물 제299호.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
각황전.. 그 앞에 서오층석탑..보물 133호..
각황전과 대웅전(우측)... 동오층석탑(앞)과..보물 132호.. 서오층석탑.. 보물 133호.
높이 640cm. 2중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데 기단과 탑신부 표면에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제루..
화엄사 보제루는 법요식 때 승려나 불교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강당건물이다.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대웅전 앞 한단 낮은 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 쪽 창문은
7칸 모두 큰 두짝의 빗살문을 달고 그 반대쪽 5칸은 널판지문을 달았으며 좌우 양칸은 문을 생략하였다.
성보박물관을 관람하고.. 사자상..
국보 35호 화엄사 '사사자(四獅子) 삼층석탑'을 빼다 박은 돌사자상 한 점이 최근 일본에서 돌아왔다. 도쿄 주일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뒤 전남 구례 화엄사 경내에 봉인된 석사자상(石獅子像)이다. 화엄사 사자상의 DNA를 100% 물려받은 이 복제품은 80여 년 기구한 운명의 굴레를 벗고 '아버지' 곁으로 귀향했다. 자칫 반출될 뻔했던 국보를 지킨 아들 복제품의 사연이 기구하다.
구례 화엄사 벽암국일도대선사비.
1663년,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각성(1575~1660년)의 탑비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전란 후에는 화엄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법주사 등의 여러 사찰의 중수를 주도하여 조선후기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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