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금동미륵대불..
산행지: 속리산.
산행일: 2019년 11월 28일.
산행자: 나홀로.
산행코스: 주차장-탐방안내소-법주사-세조길-세심정-문장대-천왕봉-세심정-법주사-주차장.
산행거리및 시간: 약 20km, 8시간 40분(휴식및 중식: 1시간 40분).
산행날씨: 맑음후 흐리고 구름 많음..
보름 열씨미 일하고 나면 주어 지는 이틀간의 휴식 시간.. 투오프이다... 어디로 갈까???
전날은 컨디션도 그렇고 오랜만에 집에서 청소 하고 빨래 하고.. 책도 읽고.. 모처럼 편안한 정비 시간을 갖고..
이틀째 오프날.. 속리산을 가기로 결정.. 눈이 많이 내렸다는 태백산을 가서 겨울 산을 맞이할까 고민도 했었지만^^.
겨울 산은 12월에 맞이 하기로 하고.. 태백산 날씨만 좋았으면 그곳으로 달려 갔을 것이다^^.ㅎ.
암튼 집에서 새벽 일찌기 190km를 달려 법주사 전 주차장에 도착(주차비 1일 기준 4,000원). 산행을 시작 하였다.
법주사 입장료는 4,000원 입니다..
아래 산행의 모습들 입니다.
적색 실선이 오늘 산행 경로. 주차장에서 법주사를 들려 한바퀴 둘러 보고 문장대와 천왕봉 정상을 찍고 다시 원점회귀..
탐방 안내소 지나 나오는 법주사 매표소...
세조길...
법주사 일주문.. 호서제1가람..
포장도로를 버리고 세조길로 걸었습니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200m 지점에 법주사가 자리 하고..
사람들 많지 않은 아침 시간에 먼저 법주사를 한바퀴 둘러보고 산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금강문... 좌측으로 당간지주와 금동 미륵불상이 보인다...
금동미륵대불...
신라 혜공왕 12년(서기 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끝에 금동미륵대불을 모셨다고 한다..
조선조 고종9년(1872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하는 자금 마련에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 갔다.
그후 일제 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으로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 하던중 약 80%의 공정 상태에서 6.25 전쟁으로 중단 되었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 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 미륵부처님이 완성되었다. 1986년 류월탄 주지스님 당시,붕괴 직전의 시멘트 미륵부처님이 해체되고 4년 뒤인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다. 기존 시멘트 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 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여 국난 극복과 민족화합, 2002년 한,일 월드컵 행사의 성공
개최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 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 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7일 금동미륵대불 회향대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이다.
개금 방법은 습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3미크론 두께로 연 도금면적 900 제곱미터에 황금 80kg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신심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 인력은 총 4,500여명 이었다고 한다.
팔상전..국보 55호..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처음 건립 되었으며, 그후 임진왜란때 불타 버려 조선 인조 4년(1626년)에 다시 지었는데
조선의 승병장인 사명대사가 주관하였다. 이후 1968년에 완전 해체 복원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상전은 5층 목조탑 건축으로 한국 목조탑의 유일한 실레가 된 중요한 건축물로 내부에 석가여래의 일생을 8장면의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가 모셔져 있어 팔상전 이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5칸, 3층과 4층은 정면과 측면 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의 정방형으로 되어있다.
처마를 장식하는 공포양식은 1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짠 주심포식이고 5층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 올린
다포식이다.
쌍사자 석등.. 국보 제 5호..
신라 석등중 뛰어난 작풍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72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가 3.3m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사자 조각이 올려져 있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석등의 구조는 8각의 지대석에서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돌에 조각 하였으면 다른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법주사 대웅보전.. 보물 915호.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776년) 진표율사가 고쳐 지었으나 임진왜란시 불타 버린후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적이 402.80제곱미터,높 이가 약 19m에 이르는대규모 건물
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이 건물과 같은 수법의 건물로 금산사
미륵전이 있다. 내부에는 높이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보물 1,360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이 안치 되어 있다.
보은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 15호..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 수법으로 보아 혜공왕(765~780) 재위 대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다시 고쳐 지을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3.9m에 이르는 대형 석등으로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 창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
하였고, 지붕돌 정상에는 보주를 받치고 있는 받침이 남아있다.사천왕이란 불교에서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동쪽의 지국천왕,서쪽의 광목천왕,남쪽의 증장천왕,북쪽의 다문천왕을 뜼한다.
석조희견보살입상.. 보물 제 1417호...
보살상은 전체 높이 213cm 규모로 신체,공양물,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가로 네모반듯한 모양의 받침들을 그 위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몸통을 세워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 되었다.향로를 받쳐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 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 옷의 표현 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시기인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팔상전과 뒤로 대웅보전.. 그리고 속리산 연봉들...
마애불이 있는 바위와 탑 전경..
이탑과 바위 아래 마애불이 있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보물 제 216호..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로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볼록 새겨진 이 여래 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 길고 큼직한 코,
둥근 눈썹, 뚜렷한 눈더덩, 꽉 다문 두꺼운 입술 등은 길다란 귀, 삼도(三道)의 표현 등과 함께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넓은 어깨에 비해서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으로
처리한 조각수법에서도 나타난다.
석련지..국보 제 64호..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95m, 둘레 6.65m 에 이르는 희귀한 석조조형물이다.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난간의 짧은 기둥)
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석조..충북 유형문화재 제 70호..
석조는 높이 1.3m, 길이 4.46m, 너비 2.4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쌀 80 가마를 채울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바닥부터 윗부분에 이르기 까지 수직의 벽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의 벽체에는 아무런 무늬 장식이 없이 단조로운 형태이나
윗면의 가장 자리는 모를 깍아서 부드러운 느낌을 내고 있다. 벽체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쪽은 23cm,짧은쪽은 34cm 두께를
조정하여 수리적인 비레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 하였다. 아랫 부분에 11cm의 구멍이 있어 실제로 물을 담아 두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모퉁이 부분 일부의 손상 흔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당간지주..
당간이란 찰 또는 찰주라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을 사찰이라 말함은 절에 당간 즉,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다. 한편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현 재 전하는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 목종 7년(1006년)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전체 약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년) 국가재정 마련을 위한 당백전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 들이 수거된 바 있었는데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경) 이곳
철당간은 22m의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 되었으며,1972년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절집을 나오며 다시 뒤돌아보고...
벽암대사비... 충북 유형문화재 제 71호..
이 비석은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인 벽암대사(1575~1660)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 5년(1664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정두경이 지었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커다란 암반위에 홈을 파서 세웠으면 규모는
높이 213cm, 폭 110cm, 둘레 35cm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승이며 승병장인 벽암대사는 임진왜란 때에 해전에 참여
하였으며, 인조 2년(1624년)에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때 8도 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인조 14년(1633년)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 3천명을 모은 후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법주사 전경.. 주차장을 출발하여 법주사를 둘러 보는데 1시간 가량 소요 되었습니다..
산행 시간이 있어 자세히 둘러 보지 못했네요^^. 적멸보궁과 세존사리탑이 사진에 빠진 것도 아쉽고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 합니다.. 09:45분경...
다시 세조길로 이어지는 산행길.. 이곳에서 세심정 까지는 차가 다닐수 있는 도로가 있으며 세조길이 따로 있습니다..
세조길 설명.. 이곳 속리산은 세조와 얽힌 전설이 많더군요.. 들어 오는 입구에 정2품 소나무도 그렇고요..
우측 차도를 버리고 좌측 세조길로...
눈썹바위...
세조가 바위 아래 그늘에 앉아 생각에 잠겼던 자리로, 속리산을 찾은 사람들이 비바람과 한 낮의 더위를 피하던 장소이다.
생긴 모습이 마치 사람의 속눈썹을 닮았다 하여 눈썹바위라 불리고 있다.
세조길 옆에 속리산 사방댐.. 정면에 보이는 수정봉..
사방댐 위에 태평휴게소라는 곳이 있더군요...
문장대 가는 길에도 몇개의 개인 산장이 있었고 문장대에서 천왕봉 가는 주릉에도 신선대 산장이 있더군요..
설악산은 공원 밖으로 다 철수 시켰는데.. 국립공원내 개인산장이 이렇게 많은건 처음 보내요^^.
태평휴게소가 세심정과 법주사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네요^^.
이런 세조길을 걸어...
목욕소..
세심정 전경..
세심정 절구..
세심정의 이정표..
이곳 세심정부터 문장대(좌측으로)와 천왕봉 정상 가는 길이 갈리는 지점 입니다. 문장대를 먼저 오르기로 합니다.
이 뭣고 다리를 건너고..
나오는 복천암.. 잠시 들려서 한바퀴 둘러보고요..
복천암 극락보전...
복천암 전경..
고려 공민왕이 복천암 극락보전에 무량수(한량없이 긴 생명)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내렸다 하네요..
조선 세조는 복천암에 기거하고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고 나라의 번창을 빌며 대법회를 열고 복천사에 쌀 300석과 노비 30구,
전지 200결을 하사 했다고 전해 진다능.. (조선왕조실록)..
신미대사는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세종의 명으로 석보상절 편찬 작업에 함께 참여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 당시 편찬된 책자들은 초기 훈민정음 연구에 잇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현재 복천암에 신미대사부도탑이 있다.
조금 더 오르면 나오는 산장.. 용바위골 휴게소..
용바위골 휴게소.. 파전도 팔고 라면도 파는가 봅니다^^.
이곳은 두번째 산장.. 아래 경상도 산장 이라 했나? ㅎ. 문장대 한시간은 더 올라야 한다고...
할딱고개를 오르면 나오는 보현재 휴게소.. 비석에 경상도집 이라 적혀 있네요^^.
붉은겨우살이..
겨우살이..
겨우살이..
문장대 오르기전 마지막 휴게소인 냉천골휴게소...
냉천골 휴게소는 문장대 1km 남겨 두고 있네요...
이제 또 다시 가파른 산길과 게단을 오르면...
게단 옆으로 노박덩굴이 몇개체 있더군요...
문장대 아래 안부.. 천왕봉 갈림길이 나오고요.. 전에는 이곳에 휴게소(산장)가 있었는데요..
문장대에 오른는 길도 살짝 돌려 놓았군요..
드디어 문장대 입니다... 해발 1,054m로 천왕봉(1,058m) 정상 보다 낮다.
문장대는 원래 큰 암봉이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속에 감추어져 있다하여 운장대라 하였으나, 세조가 속리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때 꿈속에서 어느 귀공자가(월광태자)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서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것 이란 말을 듣고 찾았는데 정상에 오륜삼강을 명시한 책 한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종일 글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문장대 정상부 모습.. 둥글게 패여있는 암반에 물이 고여 있었고요..
내려다 본 안부와 가야할 속리산 주릉..중간에 높은 봉이 정상인 천왕봉 이다..
문장대 정상에 조망 안내도..
정상 조망 안내도..
관음봉과 저 뒤로 묘봉과 상학봉..
저멀리 군자산도..
7형제바위..
다시 돌아본 문장대..
가야할 주릉..
문수봉에서 바라본 문장대 전경..
가야할 신선대.. 신선대 산장..
주릉에 계단은 이렇게 자연석을 깍아 만들었더군요..
진행하며 돌아본 주릉의 모습..
신선대 산장.. 주인장은 없더군요^^.
경업대도 가보고 싶은데.. 오늘 산길이 그리 만만치 않네요..
돌아본 암봉들..
무엇을 닮았나요?
걸어온 주릉에 수많은 암봉들이..
큰오색딱따구리 한쌍이..
시끄럽게 나무를 쪼아대고 있더군요.. 머리에는 붉은 색이 안보이고 배를 보니 큰오색 암컷 이네요^^.
저 뒤로 가야할 천왕봉..
이런 석문을 빠져 나가고요..
천왕봉 600m를 남겨둔 삼거리..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하산해야 합니다..
오름 300m를 남겨 두고 헬기장..
천왕봉..
정상에 나홀로.. 싸락눈이 조금씩 흩날리고... 조금후 장각마을에서 오른 서울서 오신 산님 두분..
블랙야크 100명산 인증을 하고 하산한다.. 최단거리로 올라와 인증 사진 담고 온길로 하산^^.ㅎ.
우리 서산에 가야산은 차타고 오른후 5분정도 걸어 정상 인증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정상에서 바라본 주릉과 저멀리 문장대..
문장대를 당겨보고..
배석대..
상환석문..
상환암..학소대..
상환암 원통보전..
상환암 남쪽 방향으로 절경을 이루는 암벽입니다. 옛날에 '학'이 살았다하여 "학소대"란 이름 붙여 졌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상환암에서 100일간 기도를 올릴때?.. 목욕 재계를 하고자!.. 냇물에 이르자!..
'학'의 똥이 떠내려 오기에!.. '학'들을 쫓아 버리고 '학'의 집을 메워 버린 후에는!..
'학'들이 깃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집니다.
순조대왕 태실이 있는데 산행 막바지에 날도 어두워지고 힘들어서 올라 가보지 못했네요^^.
태실 사진 한장 퍼왔습니다..
이런 다리를 건너고..
스님은 저녁 운동중^^.
스님 한분이 마중 나오셨네요^^.
날은 어두워지고 부지런히 법주사 앞을 지나고... 주차장에서 애마를 회수 다시 190km를 달려 귀가..
오늘의 산행 기록을 마침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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